반응형

 

##

 

지난 포스팅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 의학사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동의보감에 대해 설명드리며 포스팅을 시작하겠습니다.

 

##

 

  『동의보감』은 조선 건국 이후 이어져 온 우리 나라의 의학 전통이 총결집된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학사적으로 『동의보감』은 금원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고 체제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던 위정자들의 요구에도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동의보감』이 현실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동의보감』이 당시에 급격히 증가한 의료에 대한 수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이론과 임상치료 전반에 걸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종합의서였기 때문입니다. 『東醫寶鑑』의 간행 이후 우리 나라의 의학은 국가 주도의 의학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민간주도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임상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경향은 이후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醫門寶鑑(의문보감)』、『濟衆新編(제중신편)』 등 『동의보감』의 아류에 해당하는 서적들의 출판과 『攷事撮要(고사촬요)』、『攷事新書(고사신서)』 등 본초서적의 출간, 『鍼灸經驗方(침구경험방)』、『鍼灸要訣(침구요결)』 등 침구서의 출간 등은 임상의학이 이론과 실제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특히 허임의 『침구경험방』에 소개된 보사법과 사암도인의 사암침법 등은 동의보감에서 고양된 조선 의학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발휘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습니다. 19세기에 들어와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새로운 실용의학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이제마(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동의수세보원)』、황도연(黃度淵)의 『醫宗損益(의종손익)』과 『方藥合編(방약합편)』、이규준(李圭晙)의 『素問大要(소문대요)』와 『醫鑑重磨(의감중마)』 등이 간행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당시까지의 전통 한의학을 체질이론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우리 나라 고유의 사상체질의학을 완성하여 한의학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받습니다.

 

##

 

4) 일제 식민지와 현대

  조선 말기까지 국가의 보건의료를 전담해오던 한의사들은, 1900(광무 4) 종래의 의과(醫科)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의사규칙(醫士規則)’이 제정되면서 근대식 의사의 지위로서 새로 유입된 서양의사들과 함께 관리로 임용되어 일반 의료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에 따라 한의사는 모든 관용 의료에서 배제되었으며, 1913년에는 의생(醫生)으로 격하되는 등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제 강점 하에서도 그 명맥은 미미하게나마 이어졌는데, 조헌영(趙憲永) 1934년에 『通俗漢醫學原論(통속한의학원론)』을 저술하였고, 동서의학의 비교를 논한 장기무(張基茂)의 『東西醫學新論(동서의학신론)』과 동서의학의 병증과 병명을 대조한 최동섭(崔東燮)과 이면수(李冕秀)의 『醫門須知(의문수지), 도진우(都鎭羽)에 의해 동서의학연구회에서 간행된 『東西醫學要義(동서의학요의)』가 있습니다.

  근대적 한의학 교육기관의 시초는 1904(광무 8)에 설립된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인데, 이는 근대화의 물결과 일제의 말살정책으로 인해 폐교되었고, 해방후 1948년에 4년제 교육기관인 동양대학관이 만들어졌다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된 후인 1953년에 동양대학관이 폐관되고, 다시 입학정원 60명으로 서울한의과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이후, 서울한의과대학은 서울 성북구 안암동으로 이전 개교하였으며, 1955년에는 동양의약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약학과를 증설하고 교사도 증축하는 등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961 5.16 정변을 통해 집권한 군부는 국가 재건이라는 구호 아래 국민의료법을 전면 폐기하고 새롭게 의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의료일원화로 방향을 잡아, 당시 유일의 한의학 전문교육기관인 동양의약대학을 대학설치기준령 미달이라는 이유로 문교부령에 의하여 폐교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한의사협회와 한의대 재학생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건의서와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의대 부활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한의계의 반발과 국민적 여론에 밀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문제된 의료법을 개정함으로써 64 6년제 동양의과대학(한의학과 6, 약학과 4)이 부활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동양의대의 행림재단이 경희대학교 고황재단에 합병되면서 한의학과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의학과로 바뀌었으며, 68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이, 1974년에는 박사과정이 설치되어 심도 있는 한의학 교육과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70년대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전국적으로 한의과대학이 증설되기 시작하였는데, 1972년 원광대학교에 한의과대학이 인가된 후로 11개 한의과대학이 개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학(私學)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한의학교육과 연구를 위해서는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었습니다.

  2008년에는 국립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이 개설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의학 교육분야에 국가적인 지원이 가능해졌습니다. 1994년 정부에서는 한국한의학연구소(이후 한국한의학연구원으로 개칭)를 설치하여 국가 주도적인 한의학연구를 시작하였으며, 1997년에는 보건복지부내에 한방정책관이라는 직제가 설치됨으로써 행정적으로도 한의학의 관리와 육성이 본격화되었습니다.

 

##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난 포스팅과 이번 포스팅동안 우리나라 의학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고, 다음 포스팅에서는 우리나라 의학사에서의 중요한 성과를 중심으로 그 의의 등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 의학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반만 년 전 건국신화를 소개하고 있는 삼국유사에는 쑥과 달래가 등장하며, 이는 의약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역사 문헌을 통해 우리 전통의학이 중국의 전통 의학과 밀접하게 상호 교류함으로써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13세기 이후에는 우리 전통의학의 독창성이 향약, 동의학 등으로 성립되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 의학의 흐름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삼국시대 이후 고려 전기까지는 의료제도의 정비、의서 연구、방서의 발간 등 의료의 기본적인 틀을 잡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었으며,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향약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의학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의학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어 각종 의서의 발간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金元醫學(금원의학)이 도입/정리되면서 마침내 『東醫寶鑑(동의보감)』이 간행되었습니다. 동의보감의 편찬 이후 우리나라의 의학은 사회적 환경의 영향으로 국가 주도의 의학에서 민간 주도의 전문의학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말기에는 다시 새로운 의학 체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체질의학이 완성되었습니다.

 

##

 

1)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고대 중국의학을 받아들이고 나서, 통일신라와 발해까지는 의료제도를 정비하고 『素問(소문)』、『鍼經(침경)』、『難經(난경)』、『本草經(본초경)』、『甲乙經(갑을경)』、『明堂經(명당경)』 등의 기본 의서를 중심으로 이론을 연구하였으며, 『高麗老師方(고려노사방)』、『百濟新集方(백제신집방)』、『新羅法師方(신라법사방)』 등의 방서를 간행하여 우리의 실정에 맞는 의료체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한편, 삼국시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학의 수입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보편화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의 질병에 고대 중국의학의 활용보다는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학을 익힌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중앙과 정부의 의료기구를 더욱 확충하였으며, 의료제도를 실시하여 의료 인력의 양성과 학문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중국 의서의 간행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학 발전에 힘입어 고려 중기부터 고려 자체의 방서들이 만들어졌는데, 『濟衆立效方(제중입효방)』、『新集禦醫撮要方(신집어의촬요방)』、『鄕藥救急方(향약구급방)』、『三和子鄕藥方(삼화자향약방)』、『鄕藥古方(향약고방)』、『鄕藥惠民經驗方(향약혜민경험방)』、『鄕藥簡易方(향약간이방)』、『東人經驗方(동인경험방)』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일련의 향약서(鄕藥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후 환경과 지리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서 중국과는 차이가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려의 향약 개발을 위한 노력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새롭게 들어온 금원의학의 영향으로 다소 약화되었으나, 그 정신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

 

3) 조선시대

  조선은 건국 이후 유교 이념에 따라 새로운 유교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통치의 일환으로 의료체제의 정비에 힘썼습니다. , 의료는 통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의학과 조선시대 의학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조선정부는 우선 의료기구를 재정비하였는데, 중앙에는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삼의사(三醫司)가 있었고, 제생원(濟生院)、활인서(活人署) 등의 특수 기구가 있었으며, 지방에는 의원을 두어 모든 의료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의료제도가 있었으며, 수시로 의료인력을 수급할 수 있는 취재(取才)를 따로 두었습니다. 의학 교육은 해당 관청에서 담당하였으며, 의생은 전의감、혜민국、제생원에 분속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의학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을 두고 나라에서 직접 의학교육을 시켰는데, 이 제도는 16세기에 금원의학의 수용과 동의보감의 완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선은 의료제도의 정비와 동시에 건국 초기부터 국가 주도의 대규모 의서 편찬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태조 때에 이미 30권의 『鄕藥濟生集成方(향약제생집성방)』을 간행하였으며, 대대적인 문화 사업이 시행된 세종 때에는 『鄕藥集成方(향약집성방) 85권、『醫方類聚(의방유취) 365권 등이 차례로 간행되었습니다. 『향약집성방』은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시대 향약 개발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새로운 의학 전통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과 처방 중심의 편제는 고려의 향약서들과 유사하지만, 병증에 대한 설명이 더욱 풍부해지고 백과사전식으로 그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고려시대 향약서들과 거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흐름이 바뀐 이유는 고려말과 조선에 걸쳐 중국의 금원의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새로운 의학 지식의 수집과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다양한 지식을 모은 책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의 유입과 이념이 결합함으로써 『향약집성방』의 성격이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향약집성방의 편찬 이후 향약 운동이 마무리되고 세종 때에 와서 당시까지의 의학서들을 총합한 『의방유취』가 간행되었습니다. 『의방유취』는 명나라 초기까지의 중국 의서 153종을 수집하여 91개의 門()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으로 분량이 많아 세종 때에는 간행되지 못하고 성종 때에 가서야 겨우 30질이 간행되었습니다. 『의방유취』의 완성으로 우리나라의 의학은 중국의학의 지식을 새롭게 정리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의방유취』가 완성된 이후로는 중국 의학에 대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 중국 의서의 간행에 역점을 두게 되었는데, 『內經(내경)』과 『傷寒論(상한론)』으로부터 송、원、명대의 의서 약 70여 종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국가 주도에 의하여 의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금원시대의 의학은 더욱 활발히 우리나라에 수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미 많은 금、원、명의 의서들이 인용되었으며, 취재 과목으로 張子和方(장자화방)이 채택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5세기에는 아직 금원의학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다는 四大家(사대가) 각각의 주장을 단편적으로 파악하거나, 그 처방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중국의 의학전통에서 볼 때, 금원의학이 가지는 특징은, 형식면에서는 이론과 임상의 유기적인 결합이 이루어졌고, 내용면에서는 장부와 경락을 바탕으로 하여 인체의 생리 및 병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 『내경』과 『상한론』 이후 당나라.송나라 때까지는 의학의 기초이론인 음양오행이론과 장부 경락 체계를 임상과 체계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많은 양의 처방을 수집한 방서들이 더욱 많았던 것에 비해, 금원사대가부터는 『내경』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생리 병리이론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임상에 효과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금원의학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명대의 의서인 『醫學正傳(의학정전)』、『萬病回春(만병회춘)』、『醫學入門(의학입문)』 등이 수입되었는데, 이러한 책들이 바로 금원시대 의학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금원의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4세기부터 두드러졌던 의학의 발전은 1610년 허준에 의하여 『동의보감』이 완성됨으로써 일단락 되었습니다.

 

##

 

포스팅이 길어져서 여기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동의보감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안녕하세요? 저는 고대부터 이어져온 기존의 문헌들, 또는 상업적 출판을 제외한 이용이 자유로운 교재들에 근거하여 임상 각 과를 제외한 한의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내용을 앞으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며 한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

 

 인류는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발생하는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으며, 이는 전통의학의 형태로 계승/발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의학에는 인류의 탄생 이후 축적해온 귀중하고도 방대한 임상적 경험과 기술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서한 시대의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에서는 고대 중국문명의 창시자로 존숭되고 있는 삼황(三皇) 가운데 하나인 신농(神農)하루에 70가지 약물을 맛보았다는 기록을 통해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된 한약 관련 임상실험을 소개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군신좌사(君臣佐使) 이론에 따라 처방된 한약화합물이 양약보다 인체 내 대사산물의 화학적 구조에 더 유사하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한의약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입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의학은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 완화시키거나 치료하는 학문, 혹은 기술입니다. 그런데 의학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인체에 관한 객관적인 진리체계 구성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체에서 나타나는 생명현상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함수의 추상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측면이 많고, 절대적인 기준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학의 진리체계는 결국 우리 몸의 비질서(disorder)를 질서(order)로 환원시키는 능력을 우선적인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비질서를 질서로 환원시키는 능력이 있으면 넓은 의미에서 의학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

 

 그러한 관점에서 현재 지구상에는 양의학과 함께 한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의학이 광의의 의학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기원한 한의학은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을 거쳐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입니다. 근대 서구 자연과학기술에 힘입어 양의학이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한의학은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 과학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비해 완만한 인체의 진화 속도를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못한 양의학의 한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양의학은 자연과학을 도구로 분석적/환원주의적/통계적/객관적 접근을 하면서 실험에 기반을 두고 질병 중심으로 적극적/공격적인 치료를 위주로 하는 인위적 성격을 띱니다. 그리고 한의학은 철학을 도구로 전인적/주관적/접근을 하면서 경험에 기반을 두고 인간 중심으로 예방적/방어적인 치료를 위주로 하는 자연주의적인 성격을 띱니다. 따라서 이러한 양의학과 한의학의 상호보완적인 노력을 통하여 인간과 질병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의학의 탄생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

 

 한의학이 채택하는 기본적인 관점과 내용들은 자연과학의 내용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한의학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질병으로 대표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며, 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산물을 활용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대전제를 가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활용되고 발전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한의학은 현대에도 주류 의학의 한 축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더욱 지속적인 발전과 보편적인 활용을 위해서 현대과학에의 접목과 검증이 필요한 것 뿐입니다.

 

##

 

 최근 한의학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전 인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과학 기술이 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이 폐기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속 유지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의학의 내용 가운데 의료적으로 유용하고 가치 있는 부분만을 남기는 취사선택의 과정이 진행될 것입니다. 2009년 세계 전통의학 문헌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최근에 국보로까지 지정된 동의보감은 400년 전 동북아 지역의 의학 지식과 기술을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허준 자신의 창의적인 의론보다는 그 때까지 전해 내려온 중국 문헌의 인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가치는 퇴색되지 않고 있습니다.

 

##

 

 韓醫學(한의학)은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해온 전통의학으로, 인체의 생명, 건강 및 질병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전 인류의 건강 증진과 질병 치료에 기여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이 점차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침구치료, 전인적인 접근방식 및 사상체질론 등 한의학의 일부 내용은 이미 양의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의학은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사회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동시에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융합된 자연과학 기반의 의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

 

한의학의 특징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1) 한의학은 자연과학 (natural science)의 범주에 속한다

자연과학은 자연계 각종 물질의 운동, 변화 및 발전의 원리나 본질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한의학의 연구대상은 사람이고, 주로 인체의 生()/()/()/()/()의 생명법칙, 인체의 형태구조, 생리공능, 질병의 발생과 발전 및 예방 치료에 관해 연구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생리공능의공능(功能)’은 유기적인 기능(organic function)을 의미하며, 단순히 기계적인 작용을 의미하는 機能(기능)과는 구별되는 말입니다.

 

##

 

(2) 한의학은 사회과학 (social science)의 특성을 가진다

사회과학은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고, 이는 건강과 질병과 관련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회환경의 변화와 사회적인 지위 및 경제조건의 변화가 心身(심신)의 건강에 항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는 한의학은 사회과학적인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

 

(3) 한의학은 고대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문이다

철학은 자연과 사회, 인간 존재의 보편적 원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자연과학의 발전도 철학의 역할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한의학은 고대 중국에서 기원하였으며, 당시 철학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의학이 형성 및 발전되면서 지속적으로 당시의 철학적 성과들을 받아들였는데, (), 陰陽(음양), 五行(오행) 등 철학사상은 생명, 건강, 질병 등 일련의 의학문제를 설명하는 도구로 채택됨으로써 한의학 이론체계의 구축에 기여하였습니다.

 

##

 

(4) 한의학은 다양한 학문분야가 서로 융합하여 만들어낸 성과이다

고대의 철학사상이 한의학 이론체계의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뿐 만 아니라, 당시의 천문학、기상학、지리학、농학、생물학、광물학、식물학、군사학、수학、양조기술 및 야금술 등 다양한 과학 기술이 모두 한의학 이론체계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예컨대 기상학 지식은 六淫(육음) 病因學說(병인학설)의 형성에, 병법의 지식은 치료원칙과 방법의 형성에, 사계절 등 자연계의 변화에 대한 지식은天人相應(천인상응)”사상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

 

이처럼 한의학은 당대의 다양한 과학 지식과 기술을 접목하여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첨단 과학 기술과의 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학적 성취를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첫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