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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포스팅에 이어 우리나라 의학사의 중요한 성과에 대한 포스팅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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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東醫寶鑑(동의보감)』의 출현과 한국의학의 정립

 (1) 조선의 관치(官治)의학

 조선은 유교정치 실현의 한 방편으로 의료제도를 정비하여 학문의 발전과 의료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중앙에 전의감(典醫監)、내의원(內醫院)、혜민서 (惠民署) 등을 두었으며, 지방에는 각 도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의료 행정과 시술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료 인력의 수급에 있어서는 의과(醫科)를 통해 의원을 뽑아 관리로 등용시켜 진료를 담당케 함으로써 국가가 의료 전반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 일반 의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확대됨으로써 관의(官醫)의 역할이 크게 강화된 것이죠. 또한 유능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의학 교육을 활성화하였는데, 각 관청에서 실시하는 의학 교육 이외에도 관리의 신분으로서 의학 공부에 전념하도록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을 따로 설치하였습니다. 의서습독관이 설치됨으로써 금나라.원나라 의학 중심의 새로운 중국 의학의 수용이 더욱 빨라졌으며, 『동의보감』의 편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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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금원(金元)의학의 수용

 중국 의학은 금나라.원나라 시대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 의학의 특징은 송나라 시기에 발달한 주자학의 인본주의적 경향 속에서 『내경』과 『상한론』에 담겨진 한의학의 전통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송나라 시대까지 수집된 방대한 양의 임상경험과 의가 스스로가 체험한 임상결과들을 재해석하여 체계적으로 종합시킨 의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원의학이 시대적으로는 고려말에 해당하지만,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황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은 조선 초기 부터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의학은 고려시대의 향약 운동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 금원의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의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고려의 향약서들은 우리의 실정에 맞는 처방들을 모아 급한 질환, 또는 간단한 질환에 있어서 일반인들도 손쉽게 치료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처방의 정리로는 다양한 질병의 치료에 적절히 대처하기에 부족하였으며, 더욱 발전된 금원시대 의학의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금원의가들의 주장을 정리하여 종합한 『醫學正傳(의학정전)』、『萬病回春(만병회춘)』、『醫學入門(의학입문)』 등 명나라 의서가 임상가에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로써 『동의보감』이 편찬되기 직전인 16세기말에는 이미 금원시대의 의학이 우리 나라에 정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향약 연구의 전통 가운데 우리나라에 맞는 치료방법을 개발하려는 정신은 향약의 재배와 채취에 대한 노력 등으로, 급한 병에 대한 간편한 처치를 목적으로 한 것은 조선 전기 여러 구급서의 편찬 등으로,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손쉬운 의학을 만들려는 노력은 조선 전기 각종 언해본의 발간과 후기의 『方藥合編(방약합편)』 등의 간행으로 그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금원의학의 이론적 바탕 위에서 의학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동의보감』이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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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東醫寶鑑(동의보감)』의 성립

 조선 14대 왕 선조는 1596년에 의서의 편찬을 허준에게 명령하였는데, 정작、양예수、김응탁、이명원、정예남 등과 함께 편집국을 설치하여 편찬에 착수하였습니다. 다음해 정유재란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후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단독으로 이 일을 완성하도록 명하고 내장방서(內藏方書) 5백 권을 내어 고증자료로 삼게 하였습니다. 10여 년의 노력으로 광해군 2(1610)에 편찬을 끝내어 서명을 『동의보감』이라 하고, 광해군 5년 내의원(內醫院)에서 활자를 써서 상재(上梓)하여 25() 25()으로 반포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정치가 불안해지면서 건국 초기의 국가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결국 국력의 약화로 왜적의 침입을 받아 민생이 피폐해졌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일반 백성들이 질병의 치료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서 의료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면서 임상에 쉽게 응용할 수 있고 동시에 의학교육에 필요한 이론서의 역할도 겸할 수 있는 새로운 의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의학사적으로, 『동의보감』은 금원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금원의학은 고려말과 조선초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의방유취』의 편찬과 대량의 중국 의서의 간행으로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교육기관과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의 설치를 통하여 그 내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양예수는 『동의보감』이 완성되기 전 『醫林撮要(의림촬요)』라는 의서를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은 내용과 편제에 있어서 『동의보감』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내용상 『醫學正傳(의학정전)』을 많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 금원의학이 실제로 『동의보감』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의보감』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도교 문헌으로부터의 인용이 많고 인체의 精()、氣()、神()을 강조하였으며, 집례(集例)에서 허준 자신이 “도가는 그 정수(精髓)를 얻은 것이고 의가는 그 조략(粗略)을 얻은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가사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동의보감』이 한의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도가사상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며, 16세기에 들어서 도교가 발전하였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실제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정작의 형인 정렴은 易學(역학)의 대가인 남사고의 문하생으로서 『丹家要訣(단가요결)』을 지었으며, 수련(修鍊)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동의보감』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동의보감』의 편제는 내경편(內景篇)、외형편(外形篇)、잡병편(雜病篇)、탕액편(湯液篇)、침구편(鍼灸篇) 등으로 되어 있는데, 외형편과 잡병편보다 내경편을 첫머리에 둔 것은 질병의 치료보다는 양생(養生)이 더 중요하며, 외형보다는 내부의 정기신혈(精氣神血)과 오장육부가 인체에 있어서 중심이 된다는 관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각 문()의 내용에 있어서도 이론과 학설을 먼저 세우고 나서 병인、증상、치법 등을 논하고 있어서, 이 책 하나로 의학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습득할 수 있고, 아울러 임상에서도 그 응용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본초(本草)와 방제(方劑)에 있어서는 허준 자신의 임상 경험을 살려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을 배척하고 유효한 처방을 기준으로 하여 약량(藥量)을 우리 체질에 맞도록 조절하였으며, 향약의 사용을 권장하기 위하여 약재의 이름에다 속명을 한글로 덧붙여 표기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이 간행된 이후, 의가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바로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 몇 차례의 재간이 이루어졌습니다. 『동의보감』은 한국 의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한국 의학이 이론과 임상의 각 분야에서 모두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의학의 정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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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에는 체질의학에 대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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